저는 고등학교를 2학년 때 그만뒀습니다.
그만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고,
두 번째는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제가
가장 친했던 친구를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저는 독산동 근처에 있는
이모 집에 기생하게 되었고,
노량진의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주유소 일도 시작했어요.
어쨌든 오전엔 검정고시
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오후부터 밤까지는 주유소에서
일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연히 조금 늦게
학원에 들어가서,
학생반도 아닌 성인반도 아닌
어중간한 반에 배정되었습니다.
매년 4월과 8월에 검정고시가 있는데,
생각이 없거나 자신감이 넘쳐서
중간에 접수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처럼요.
제가 들어간 반에는 10대 꼴통들을 포함해,
2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했어요.
그중에 30대 중반쯤 된 누나가 있었습니다.
10대들은 그 누나를
“대모”라고 불렀어요.
그냥 그랬습니다.
누나라고 부르기엔 애매하고,
이모라고 부르긴 더 애매했거든요.
특히 50대 아주머니 한 분이
평소에 어린애들 간식도 챙겨주시고
살뜰히 보살펴 주셔서, 모두들 그분을
“대모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30대 누나는 두 번째 대모님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그 누나는 미용사 자격증 공부를 하며
검정고시 공부도 병행하고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다른 학생들에게 자기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외모는 아주 평범했어요.
마르지도 않고 통통하지도 않았고,
얼굴도 평범했습니다.
안경을 썼고, 머리는 흑발에 길었지만
항상 하나로 묶고 다녔어요.
윤기 없는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이었는데,
미용사 공부하는 사람이면
머리 관리도 하지 않나 싶기도 했죠.
성격은 대체로 살갑고 원만해서
다들 잘 지냈지만, 저에게는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학생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대화할 때, 특히 그 누나가 이야기에
열중하면 눈이 따로따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어요.
아주 얇은 은테 안경 너머로 양쪽 눈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며
목소리까지 높여 이야기할 때면,
솔직히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어느 날, 학원에서 모의고사
비슷한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는데,
그날은 학원이 일찍 끝나 점심을
먹으러 나가려고 했습니다.
저는 혼자 밥 먹고 PC방에 가서 시간을
때우다가 주유소로 갈 생각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그 누나가 와서 밥을
사주겠다고 하며 함께 먹자고 하는 겁니다.
잠시 고민했지만 두 가지 이유로
수락했습니다.
첫째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얼마 전에 그 누나가 요약 노트를
보여줘서 덕분에 시험을 쉽게
봤던 터라 고마운 마음이 있었어요.
공짜로 밥을 사준다는데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학원을 나왔는데,
갑자기 누나가 택시를 잡고
타라고 했습니다.
순간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누나는
빨리 타라고 재촉하더군요.
뒤에서 차들이 빵빵 거리고 있어서
멀거니 서 있기도 좀 그래서 일단 탔습니다.
근방의 식당에 가는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택시는 신길동 끝자락까지 갔습니다.
노량진에서 대방을 지나서 가야 하는 곳인데,
택시로 10분 정도 걸렸어요.
그렇게 한 허름한 빌라 앞에 도착했고,
누나는 요금을 내고 저와 함께 내렸습니다.
저는 “여기 어디냐”라고 물었고,
누나는 “자기 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밥 먹자더니 왜 집까지 데려왔냐”
고 물었지만,
누나는 집에서 밥을 해 먹으면 돈도
아끼고 좋지 않겠냐며,
제가 머리가 좀 지저분하니 자기가
잘라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팔을 잡아끌더니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누나의 집은 1층이었는데,
누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문간에 서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시 가만히 있었죠.
거실 한가운데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누나의 어머니로 보이는 60대 초중반의
할머니와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소파 앞 바닥에 앉아 있었어요.
둘 다 동시에 저를 쳐다보길래
누나에게 눈짓으로 물었죠.
누나는
“엄마, 나 학원 동생 데려왔어. 인사해”
라며 저를 소개했습니다.
저는 순간 당황해서
“아, 안녕하세요…”라며 더듬었고,
남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저를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습니다.
누나의 어머니는 천천히 두어 번
끄덕이고는 똑같이 정면을 응시했습니다.
누나가 저에게
“신발 벗고 들어오라”라고 해서,
저는 멀거니 따라 들어갔어요.
누나가 자기 방을 가리키며 들어가
있으라 해서 방으로 따라 들어가는 도중에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거실에 텔레비전이 없었거든요..
누나의 어머니와 남동생은 거실 소파
앞에 앉아서 멍하니 정면을 보고
있었던 겁니다.
누나 방의 첫인상은 지저분함 그 자체였어요.
방 한쪽은 붙박이장, 반대쪽엔
침대 없이 바닥에 깐 이부자리,
창문 있는 쪽엔 책상이 있었는데 책상 위엔
마네킹 머리가 3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완전히 대머리였고,
나머지 둘은 들쑥날쑥하게 잘린 머리였죠.
잠시 후 누나가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컵이 더러웠고 끝에 뭔가 고춧가루
같은 게 묻어 있었지만,
별 수 없이 덜 더러운 쪽으로
입을 대고 마셨습니다.
그때부터 빨리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밥은 이미 생각도 없었고,
방에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그때 누나가 주방에서 뭐를 만드는데,
엄마와 남동생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 밥 없어.”
“어, 없어.”
“학원 동생 밥 해주기로 했는데.”
“없는데…”
"xx(동생 이름)야, 밥이 없는데"
"없더라.."
"어떡해?"
"그러게.."
"어쩌지?"
"어쩌지..."
그 대화를 듣고 있으니 불쾌한 기분이 들었고,
누나가 방에 들어와서는
“미안한데 밥이 없다”며
라면을 먹으면 안 되겠냐고 묻더군요.
이 집을 빨리 나가고 싶었던 저는
“라면 좋아한다”며 얼른 먹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누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라면 살 돈이 좀…” 하더군요.
저는 주머니에 있던 3000원을 꺼내 주었고,
누나는 남동생에게 라면을 사 오라 했습니다.
남동생은 3000원을 들고나갔고,
저는 방에서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뒤에서
‘싹둑’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누나가 제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었습니다.
왼손엔 막대 자,
오른손엔 가위를 들고 웃고 있었죠.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서
“지금 뭐 하시는 거냐, 왜 자르냐”라고
버럭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누나의 두 눈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목청을 높여
“너 생각해서 머리 좀 잘라주려고 했던 건데
왜 그렇게 화를 내냐”라고 소리쳤어요.
저는 무서워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누나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반쯤 열린
방문 틈으로 남동생이 양반다리하고
앉아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대략 10센티미터 정도의 틈이었을 겁니다.
양쪽 눈과 코, 입이 다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는 피했지만,
계속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다시 쳐다봤습니다.
그랬더니 남동생이 손에 든
검정 봉지를 들어 보이며,
라면을 사 왔다는 뜻으로 무언의
신호를 보냈습니다.
저는 누나에게 말했죠.
"누나, 저기... 라면 사 오신 것 같아요."
남동생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그냥 그렇게 말했어요.
누나는 남동생을 돌아보며 씩 웃었습니다.
왜 웃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네요...
그 후 누나는 가위와 자를 내려놓고
나가서 라면을 끓였어요.
그리고 잠시 후 저에게 주방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미 어깨에 가방을 메고 있었죠.
나갈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남동생이라는 사람은 현관 앞,
신발 놓는 곳에 그대로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누나는 저에게 라면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결국 그 좁은 2인용 주방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제 자리에서 좁은 거실과 현관문이 보였고,
어머니라는 분은 텔레비전도
없는 벽을 바라보며 거실에서
계속 앉아 계셨습니다.
남동생은 마치 현관을 지키는 것처럼
서서 저를 보고 있었고,
저는 누나와 마주 앉아 라면을 먹었어요.
남동생에게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거든요.
괜히 말을 꺼냈다간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묵묵히 라면만 먹었습니다.
다 먹고 나니 누나가 머리를 더 잘라주겠다고
방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이쯤 되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말했습니다.
주유소 일하러 가야 한다고요.
그러자 누나는 두 눈이 따로따로 돌아갈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보다 앞서서 그냥 나왔습니다.
남동생은 여전히 현관에 서 있었어요.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신발을 신었습니다.
신발끈을 묶을 여유도 없었어요.
신발을 신는 내내 남동생이 옆에서
저를 내려다보는데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신발을 다 신고 문을 열자,
계속 정면만 보고 앉아 있던 어머니라는
분이 갑자기 목청이 터질 듯
웃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처음 타고 왔던 택시에서
내린 집 앞까지 걸어 나왔는데도
그 웃음소리가 들리더군요.
저는 그 순간 미친 듯이 뛰었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어요.
당시 신길에서 대방까지는 버스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저는 20분 만에 달려갔습니다.
정말 죽어라 뛰었죠.
노량진에 도착해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자르고, 바로 주유소로
가서 일했습니다.
그날 밤, 같은 주유소에서 일하며 학원도
같이 다니던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미쳤다, 완전히 미친년이라고."
그 친구는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만나는
좋은 친구이고, 입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다음날 학원에 갔더니 누나가 저를 불렀습니다.
계속 무시했지만, 점심시간이
되자 할 말이 있다며 잠깐 와달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는 비상계단 쪽으로
따라갔죠.
그리고 저에게 귓속말로 물어보는 겁니다.
"ㅁ관이(제 친구 이름)한테 얘기했어?"
"뭘요?"
"했잖아?"
"아니요, 뭘요?"
"했으면서."
"대체 뭐요, 누나네 집 간 얘기요?"
"......"
"그게 뭐라고요? 무슨 할 얘깃거리라고
그런 말을 하는데요?"
"안 했어?"
"안 했는데요"
"정말?"
"안 했다고요. 그리고 누나네 집 간 게 뭐
그렇게 중요한 얘기라고요?"
"ㅁ관이는 너한테 들었다고 하던데?"
제 친구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저렇게 떠보는 걸 보니
가까이 지내다간 언제 해를 입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 나왔습니다.
그 후 저는 학원을 그만뒀습니다.
수원으로 이사를 오며 더는 누나를
볼 수가 없었기에 학원을 관두고,
독학으로 공부해 8월에 자격증을 땄습니다.
나중에 친구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누나는 정신병력이 있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친구는 학원 사회 선생님과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더군요.
과거에 약혼자를 칼로 찔러
구속된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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