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제가 갓 스무 살이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대학교에 막 입학한 신입생이라 여기저기 어울리며
일주일 중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집에 갔죠.
그날도 술을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지방대학에 다녀서 집까지는
기차로 1시간 정도 걸립니다.)
대학교에서 기차역까지 가려면 차로
20분은 가야 했지만,
술도 깰 겸 걸어서 가기로 했어요.
혼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30대 초반의 여자가
제 앞에 와서 말을 걸었습니다.
"학생이세요?"
"네"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 대부분이 종교 관련
권유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 또 붙잡혔구나...'
하고 생각했죠.
"인상이 좋아 보이시는데 저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막차 탈 시간을 계산해 보니 여유가 좀 있어서
대충 받아주기로 했어요.
"네, 뭐."
"걸어가는데 인상이 너무 좋으시고 기운이
강해 보여서 말 걸어 봤어요."
대화를 들어주다 보니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더군요.
저는 그냥 건성으로
"네, 뭐, 그렇죠"
하고 대답하며 슬슬 대화를 끊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갑자기,
"저기, 죄송한데 음료수 좀 사 주실 수 있어요?"
종교 얘기 중에 뜬금없이 구걸이라니.
당황해서 대답했죠.
"아니요."
"덕도 많아 보이시는데 선행 좀 베푸시죠?"
"선행은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와 돕는 게 선행이지,
남의 강요에 의해 베푸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말고 저쪽 가서 음료수 마시며 좀 더 얘기해요."
"저는 시간이 없어서요. 막차도 놓칠 것 같은데요."
머릿속엔 별 잡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선교 활동하면서 구걸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
신종 사기인가? 음료수 안 사 주면 계속 물고
늘어질 것 같은데, 그냥 기부했다고 치자.'
"저기, 그럼 제가 천 원 드릴 테니 음료수
사 드시고 저는 집에 갈게요."
그런데 이 여자는 기어코 같이 가자고 하는 겁니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길래 느낌이 이상해졌어요.
그래서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니요, 좀 조용한 데로 가요. 제가 아는 곳이 있어요."
구걸하는 입장에서 장소까지 선택하는 이 의지의
여자를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저는 도망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속보로 2분 정도 걸었을까요?
혹시나 해서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 서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더군요.
그렇게 기차역으로 가는 도중,
앞에서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 두 명과 마주쳤습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아까 그 여자가 통화하던
'누군가'
가 떠오르면서 찝찝했어요.
멀리서 걸어올 때부터 저를 계속
쳐다보는 것도 이상했고요.
아니나 다를까,
남자 중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면 안 되죠."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면서,
그 여자와 이 남자 둘이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어요.
남자 둘은 키가 177cm 이상으로,
건장해서 덩치가 커 보였습니다.
몸싸움이 불가피해진다면 제가 질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있는 장소와 시간.
지방이었고 11시가 다 되어가니 주변에
사람은 눈 씻고 봐도 없었어요.
가끔 지나가는 택시의 바퀴 소리만 간간이 들렸죠.
'아, 큰일 났다.' 생각했을 때,
두 남자가 저를 사이에 두고 팔을 잡았습니다.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느껴지는 무력감에서 오는
공포가 점점 형체를 갖추며 뚜렷해졌어요.
'지금 못 도망가면 진짜 죽게 될지도 몰라.'
살면서 그렇게 뛰어본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필사적으로 손을 휘둘러 뿌리치고,
기차역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남자 둘도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쫓아왔고요.
저는 공포와 긴장,
공황 상태가 뒤섞인 채로 뛰다 보니 기차역
근처에 있는 번화한 곳에 도착했어요.
다행히 사람들이 좀 있는 곳이라 쫓아오던
사람들이 포기한 것 같더군요.
아, 이걸 신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벌벌 떨었지만 증거도 없고 경찰이 와도 없는
사람을 잡아갈 수는 없으니까 그냥
막차를 타고 집에 왔습니다.
세상이 밝고 깨끗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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