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는 형이 홍은동에 살았습니다.
그 형은 기타를 치는 형이었는데,
공연도 많이 하고 세션으로도 자주 불려 다녔죠.
제 또래 기타를 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어요.
지금은 일이 잘 안 풀려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요.
편의상 그 형을 그냥 "형"이라 부를게요.
형이 정말 잘 나가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매스컴에 나올 정도로 큰 인지도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형 분야에서는 꽤 촉망받는 유망주로
평가받고 있었죠.
그러다 형이 조금 자신감이 붙으면서
메탈 같은 색다른 장르에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수소문 끝에 한 하드록 밴드가 세네 달 정도
세션 멤버를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밴드에서 잠깐 세션을 뛰기로 했어요.
꽤 진지하게 준비하려 했던지,
형은 기타도 새로 사고 이펙터도 장만하는 등
장비를 제대로 갖추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해외
인디 앨범도 많이 샀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밴드 멤버들이 그런지,
아니면 올빼미들만 모인 건지,
그 밴드는 저녁에 시작해 아침이 되어서야
합주가 끝나곤 했습니다.
형도 분위기에 적응하면서 나름 열심히 연주를 했죠.
다른 장르에 도전하다 보니 형도 이동할 때
이어폰을 항상 끼고 다니며 연습곡들을 계속
듣고 있었어요.
형네 집에 가려면 골목길을 5분 정도
지나가야 했는데,
골목길을 피하려면 한참 돌아가야 했죠.
돌아서 가도 최소한 1분 정도는 골목길을
지나야 집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형은 평소에 듣던 짐 홀 같은 음악 대신,
딥 퍼플이나 레드 제플린 같은 음악을
열심히 들었어요.
메탈을 접하면서 자신이 뭔가 더 강해졌다고
느낀다고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밴드 내에서 약간 마찰이 있었어요.
제가 합주실에 있을 때 본 건데,
미세한 볼륨 차이로 싸운 것 같더라고요.
남들이 보면 사소한 일로 여길 수 있겠지만,
밴드 멤버들이 알바나 직장 생활을 병행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지 예민하게 티격태격했죠.
그렇게 저녁때 합주가 끝났습니다.
형은 그날 기분이 좀 언짢았지만,
다른 사람들끼리 화해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고
본인이 직접 싸운 것도 아니어서 집으로 향했어요.
역시 제플린 같은 노래를 들으며 집에 가고 있었죠.
형은 이명 때문에 이어폰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듣지 않거든요.
집에 가서 모니터 스피커로 다시 들을지언정,
밖에서는 밖 소리도 들릴 만큼 볼륨을 조절해요.
누가 주변에서 자기를 부르면 들을 정도로요.
편의점에서 담배와 맥주를 사고 집으로 향하는데,
시간이 아마 열한 시쯤 됐을 거예요.
오래간만에 마시는 맥주에 기분이 좋았죠.
밴드 생활로 생활 패턴이 엉망이라 친구들
술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한 터라 더 신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어요.
누가 따라오나 싶어 뒤를 돌아봤는데,
한 10미터쯤 뒤에 여자가 서 있는 겁니다.
하얀 옷을 입고 머리도 길었고,
어두워서 얼굴 형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형이 돌아보자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어요.
저 여자가 왜 당황하지?
나를 따라온 건가?
하다가,
형은 짐 홀을 듣던 자신이 제플린을 들으면서
강해졌다고 생각하던 중이라,
여자애 하나가 뭘 어쩌겠냐는 생각을 했어요.
고등학교 때 공연하던 자신을 보러 온
팬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졌죠.
당시 듣던 곡의 후렴구가 막 들어갈 때였는데,
그때 자신감에 차서 이어폰을 벗었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그 후렴구를 부르고 있더래요.
음정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딱 그 곡의 박자와 후렴구였습니다.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요.
형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고,
그 여자가 씩 웃고 있는 것처럼 보여 너무
무서워서 집까지 뛰어갔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다음 날 합주실에서 했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비난과 비웃음을 받았어요.
형은 억울해했죠.
"어떤 사람이 골목길에서 그런 노래를 부르겠냐,
그런 음악에 관심 없으면 이 노래
자체를 모를 텐데, 이건 귀신이다"
라고 어필했지만,
다들 지어낸 이야기라며 배척했습니다.
그날 그 형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다들 화해했고,
다음 주부터 다시 합주가 잡혔죠.
그 후 형은 간혹 그 여자를 봤다며 무섭다고 했지만,
그때마다 사람들한테 욕만 먹었습니다.
결국 형은 메탈 밴드를 그만두고 원래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 귀신도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다시 원래의
취향대로 짐 홀을 들으며 재즈 연주자로 돌아갔죠.
시간이 흘러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자친구와 헤어지고는 엉망으로 지내던
시기가 왔습니다.
형이 따뜻한 마음으로 저를 위로해 주려고
술을 사주겠다며 불러냈는데,
제 상태가 의외로 멀쩡하자
'이놈이 헤어져서 그러는 게 아니라 원래 이런 놈인가?'
싶었는지 술을 사주다 말고 가버렸어요.
여담이지만, 결국 그날 술값은 제가 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날도 열한 시쯤 늦은 저녁이 되었는데,
형은 그 노래 부르는 귀신을 종종 봤던 터라
골목길을 피해서 돌아서 가기로 했습니다.
저한테 전화했다가 욕만 먹고,
그냥 노래나 듣다가 골목길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죠.
고작 1분, 어쩌면 1분도 안 되는 시간.
형은
"어차피 눈앞에 집이 보이는데,
귀신이 나와 봐야 뭘 하겠어"
하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짐 홀의
음악을 들으며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볼륨을 줄였는지,
아니면 제플린을 듣다가 짐 홀을 들으니
갭이 느껴져서인지,
멀리서 들리는 차 경적 소리도 귀에 쏙쏙 들어왔죠.
집 앞까지 길어야 30초,
어쩌면 노래의 후렴구보다 못한 시간.
형은 그동안 보지 않으려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문득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동안 봤던 여자가 형의 뒤로 20미터쯤
떨어져 서 있었답니다.
마치 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고,
소름이 돋아 움직일 수 없었대요.
가위눌린 것처럼요.
한 5초 정도 있다가 형은 내가 뭘 잘못 보고
있나 싶어 눈을 깜빡였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더래요.
형이 본 여자가 맞았습니다.
음악이 끝나고 다음 곡이 재생되기까지 잠깐의
여백이 생겼는데,
그 순간 여자가 씩 웃는 게 느껴졌대요.
어둠 속이라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웃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죠.
그동안 들리던 노래를 따라 부르던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이번에는 또박또박 말하는 소리로 바뀌었고,
그때 도로에서 클락션 소리가 울리는 걸 듣고
정신을 차려 집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형은 그날 정신없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형이 별것 아닌 일로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 큰 성인이
서럽게 울면서 이야기를 해서 믿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일을 겪고 그 형은 밤에 밖에
절대 안 나가고 밤에 볼일이 생기면
그날을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그 형이 마지막에 들었던 말은...
오늘은 노래가 좀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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